줄 위의 광대

내가 관찰한 곳은 지점이 많은 유명한 노래방이다. 노래가 시작될 때마다 레이싱 걸을 연상시키는 여성이 “3, 2, 1, 시작!”을 외친다. 혼성 듀엣 곡 가사의 남성 부분과 여성 부분이 각각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표시된다. 이성애적 사랑과 연애, 이별에 대한 온갖 규범들―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열정적이고 ‘나에겐 너밖에 없는’ 연애, 너무나 아프고 잊을 수 ...

'건축학개론'(2012)에 대하여

“쌍년”, 네이버 기준 관람객 평점 9.50에 달하는 <건축학개론>에 등장하는 이 말은 수많은 남성들이 격하게 공감하고 411만 명이 관람한 이 영화가 첫사랑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한 마디로 정확하게 요약한다. 그런데 여주인공인 서연은 어쩌다가 남주인공인 승민에게 ‘쌍년’이 된 것일까? 간단하다. 대학 새내기였던 서연은 승민과 ‘썸’을 타다가,...

'Shape of Water'(2017)에 드러난 ‘되기’의 양상

소수-화, 여성-되기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여성이 되는 것이고 소수자가 되는 것이지, 소수자를 대변하는 것도, 여성을 대신해 말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동물-되기를 하는 인간은 동물을 대변하거나 동물 대신 말하는 게 아니라, 동물을 통해 스스로 변하는 것이며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결말에서...

'Shape of Water'(2017)와 'Call Me by Your Name'(2017)

이른바 이타주의적인 관계의 윤리라고 불리는 것은 감정이입, 동일시, 혼융confusion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윤리는 참으로 독특한, 나와 다른 사람인 너를 욕망한다. 이 윤리는 네가 아무리 나와 비슷하고, 나와 일치한다고 해도, 너의 이야기는 결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라이프-스토리들의 더 큰 특징들이 유사해보인들, 나는 너 안...

불의 순간, 얼굴의 순간

그런 순간이, 그런 감정이 있다. 타들어가는 불처럼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게, 그 온도를 알면서도 아프고 뜨거운 그런 순간이 있다. 현실에서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은 특권적 순간마저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불같은 얼굴의 순간이 있다. 나를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키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정말 섬세했다. 그 모든 감정 표현들, ...

Chris Marker, 'La Jutee', 1962

시간, 사랑, 기억에 대한, 다만 한 번에 그 중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는 영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다는, 하나의 작은 기억은 얼마든지 변화하고 그 한 장의 이미지가 풍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랑은 너의 존재 방식을 존중하고 너를 기다릴 때에 가능하다는, 그런 이야기. 한 이미지에서 말미암아 전설처럼 만들어진 추억 속에 살면서 모든 만들어진 것...

어쩌면 가장 영화적인 것이 곧 가장 현실적인 것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정반대, 완전한 영화적 해결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의존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모든 현실적 문제의 일시적, 동시적 해결이라는 오직 현실 바깥에서 철저히 현실을 지향하는 그러한 방식의 해결, 하지만 이 영화는 그와는 정반대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 어떠한 현실적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꾸준히 문제들을 시간 순서로...

연세대학교 2017년 겨울 계절학기 '여성과 복지의 정치학' 수업 보고서로 제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참담하다. 단순히 복지 제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 외에도, 영화적으로는 고통을 충분히 느끼고, 감내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심지어는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시간마저 보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과 시간 구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여유를 허가 받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 같아서 더욱 참담했다. 사르트르가『구토』에서 폭로하듯...

20161020

#왜_그렇게까지_하는_거야_어차피_실패할_텐데#폭력만이_그들이_이해하는_유일한_언어니까요1.작년에 내 여성인 친구 중 하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때 해방과 자유를 느낀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얘기했다. 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몰랐고, 얕게 아는 한에서는 공감도 하지 못했다. 공감이 안 됐다. 페미니즘이 뭐기에, 여성주의가 뭐기에. 그때의 나에게 중요한 건...

페미니스트 선언 1주년을 맞아

20171021 “저거 깨시민 코스프레 하네”프로필 사진에 무지개 프레임을 넣거나, 노란 리본을 달거나, 자기 소개에 인권과 관련된 어떤 문구를 넣어 놓았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선언이라는 정치적 표현의 핵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말이다. 선언은 정치적 표현의 가장 명시적인 종류로, 핵심은 그 내용에 있는 것이지, 발...

‘유사-고기 식품(Meat-like food)’과 ‘유사-여성 포르노(Female-like character porn)’에 대한 수요와 그것이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

# 이 글은 비거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며, 다만 '고기'의 개념을 생각할 때에 '유사-고기 식품'이 일종의 과도기적인 성질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기와 포르노/성매매는 생산 과정에서 실제 지시대상에 대한 폭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것이 일방적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물’, ‘여성’은 사라지고, 남는 건 ...

브로맨스와 걸크러시에 대하여

브로맨스 말고 로맨스,걸크러쉬 말고 크러쉬.성소수자들은 그 존재가 철저히 지워지고 거부당해 왔다. 오직 '이성애'만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여성스러움'과 '남자다움'이 '정상'으로 규정된 세상에서 남성과 남성의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는 기존에 이성간의 연애 관계를 지칭하는 '로맨스'의 변형인 '브로맨스'라는 단어로 '특별하게' 명명되었고, 여성스러...